좋은 친구란 서로가 빈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사이일 것이다. 서로의 빈 마음에 현재의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그런 사이여야 할 것이다. 그 어떤 선입관념을 가지고는 친구가 될 수 없다.
맞은편의 빈 마음에서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속엣말을 터놓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기 전에는 친구이고 싶을 뿐이지 진정한 친구가 되지 못한다.
칼릴 지브란의 그의 예언자 가운데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친구를 사귐에는 오로지 정신을 깊이 하는 일 말고는 딴 뜻을 두지 말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로가 정신을 깊이 한다는 것은 참으로 소망스러운 일이다. 정신을 깊이 하는 일을 통해서, 서로가 힘이 되고 빛이 되어 한없이 승화할 수 있다. 형식 논리로는 하나 보태기 하나는 둘밖에 안 된다. 그렇지만 정신을 깊이 하는 창조적인 우정에는 둘을 넘어 열도 백도 될 수 있다.
정신을 깊이 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예절과 신의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 예절과 신의를 바탕으로 서로간에 창조적인 노력이 기울여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범속한 사귐과 한때의 알고 지냄에 그치고 만다.
지난여름 휴가철, 내가 잘 아는 집 아무개 양이 집안에서 혼담이 오고가는 사이라는 청년을 데리고 왔었다. 그런데 날씨가 좀 덥다고 해서 그 청년이 파자마 차림으로 갈아입은 걸 보고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같은 중이야 사람 축에도 못끼니까 실례될 건 없다 하더라도, 아직 결혼도 하기 전에 속옷 바람으로 마주하고 있다니 버릇없고 무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결혼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렇지. 초면이라 당사자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내려간 뒤 그 ‘파자마’의 처남될 ㅅ군에게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절을 지켜야 할 거라는 잔소리를 한참 해주었다. 물론 그들에게 전하라고 해서다.
우리가 친구를 찾는 것은 우리들의 좀 모자란 구석을 채우기 위해서지, 시간이 남아 주체할 수 없어서 찾는 것은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예절과 신의와 창조적인 노력이 따르지 않으면 서로에게 아무런 덕도 끼칠 수 없다. 빈 꺼풀끼리는 이내 시들해지고 마는 법이니까. 그러니 상호간에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 그 사이가 날로 새로워져야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된다.
얼굴 모르고 지내던 친구 한명을 어제 처음으로 만났는데 안절부절 못하고 실수를 많이 했네요.
그게 내가 아닌데 어색해서 어쩔줄 모르고…
예절과 신의. 다시 한번 머리속에 되뇌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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